HOME >> 일본여행상식
 

쵸이저팬 2004-01-13 2613
야스쿠니 진자의 문제와 한국인의혼
 


동경 한복판인 치요다구(千代田) 황궁 북쪽에 구단(九段)이라는 곳이 있다메이지(明治)유신 이전 260여년간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德川)가문이 경사지에 9층의 석축을 쌓아 관용 저택을 지은데서 나온 이름이며 석축의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명치 유신의 주역들은 천황이 머물던 쿄토(京都)대신 지금의 동경인 에도를 도읍지로 에도성을 황궁으로 정한것은 260여년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였음을 무시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신 정권이 바뀌고 천황이 권좌에 복귀했음을 알리는 많은 상징 만들기가 필요했다.
일본 종교 사전에 이라는 책에 의하면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는 신사 약 17만개가 존재 했으며 각 지역에는 외부에서 전파된 불교,도교,유교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모시는 신사,조선과 중국에서 건너온 신을 모시는 신사등의 여러 형태가 존재 하였으며 특히 6세기경 전파된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신도를 가미한 이른바 실불사상이 형성되었다.
명치 유신이후 1869년에 구단지역의 정비도 그일환이었으며 석축옆의 비탈길을 넓히고 언덕위의 도쿄 쇼콘샤(東京招魂社)라는 신사를 세웠다 도쿠가와 가문의 수호 신사였던 아카사카(赤坂)의 히에진자(日枝神社)를 의식하여 더높은곳에 더크게 세웠다.바쿠후(幕府)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영혼을 호국의 신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워진 쇼콘사(招魂社)가운데 황실이 납폐(納幣)하는 도쿄 쇼콘사는 제일 으뜸인 신사 였다. 천황을 위해 숨진 영혼을 기리려는 쇼콘사의 설립은 이후 군국주의의 종교적 기둥이된 국가 신도가 당시에 이미 싹텄음을 보여준다.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무사들이 메이지 정부에 반란을 꾀한 세이난(西南)전쟁이 진압된 2년후인 1879년 도쿄 쇼콘사(東京招魂社) 는 그이름이 야스쿠니(靖國神社) 진자로 바뀌었다.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이름처럼 호국신사,엄밀하게는 황국(皇國)신사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이후 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 까지 전물자들이 합사(合祀)되었지만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죽는것이 조건 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등의 반란자는 물론이고 도망병이나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않은 무명 전몰자도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군국주의와 국가 신도가 절정을 이루었던 2차 대전당시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최후의 약속을 남기고 전쟁터로 향하였다. 최고의 신사에 신도의 교의에 따라서 가미(神)모셔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청년들의 마지막 위안이 었다. 그만큼 야스쿠니 진자는 광란의 이데올로기가 빚은 천황을 위한 전쟁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전쟁이 끈난후 일본을 통치한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야스쿠니의 이런 성격을 간과하지 않았다. 국가와의 관련을 완전히 끊고 단순한 종교시설로 남느냐,종교색을버린 순수한 전몰자 추도 시설로 남느냐의 양자 택일을 제시했다. 결국 야스쿠니진사는 종교시설을 택하였으나 GHQ는 다른 전몰자 추도 시설을 세워 야스쿠니신사의 특수 기능을 박탈하는등의 철저한 과거 청산은 이루지 못했다. 국가 신도가 폐지되고 1947년 새로운 헌법하에서 정교 분리가 규정된후에도 야스쿠니신사는 단순 종교 시설 이면서도 독점적 전몰자 추도 시설로 남는 모순된 상황이 이어졌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자민당은 야스쿠니신사를 국가 관리하에 두자는 법안을 잇달아 제출했으나 번번이 여론의 반발에 부딪쳐 번번이 실패 했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특별하다는 이본인들의 잠재 의식을 일깨우는데 효과는 충분했다 더욱이 1978년 10월 도조 히데기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이 합사 되면서 야스쿠니신사의 속석은 더욱 굳어졌다. 이듬해 4월 불붙은 논쟁에서 일본 보수 세력은 A급 전범은 일본이 주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연합국의 일방적 재단에 의한 규정일뿐 일본 국내법상의 범죄자가 아나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일본 원호법과 은근법 적용 대상에 포함된것을 근거로 들었다.
한편으로는 전범의 합사는 야스쿠니 신사의 뜻이 아니라 후생성이 중심이된 민관합동 기구의 결정에 의한 점이라는것을 강조했다. 2차 대전 당시 육군과 해군이 야스쿠니 신사 관리를 맡아 합사해야할 전몰자 명단을 알려 주었으나 패전후에는 이를 후생성이 맡았다. 후생성은 B,C급의 전범에 대해 1961년부터 합사 명단을 통보 하였고 A급 전범에 대해서도 1966년 2월 명부를 통보한것으로 드러났다. A급 전범을 국제 정세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은 침략전쟁을 아시아의 해방과 일본의 자위을 위한 전쟁으로 미화하는 인식과 그대로 통한다. 또한 그런 인식에 바탕한 A급 전범 합사가 일본 정부의 뜻이 야스쿠니 신사문제의 본질인것이다.
야스쿠니 신사 법안 추진파는 국영화 법안 통과가 무산되자 종전 기념일(패전일)에 해당하는 8월15일에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 하자는 운동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문제는 이곳에 있다 총리의 공식 참배가 관례화 되면 그후에는 일왕이 공식 참배 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 날것이며 헌법 개정 움직임도 급물살을 탈갓이란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정점으로한 군구시대로 회기할지도 모른다.
즉 야스쿠니신사의 공식 참배가 천황제,헌법개정,군사 대국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얘기이다.
한편으론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안치된 한반도 출신의 전몰자는 약 2만1천1백81명에 이른다. 주로 태평양 전쟁때 군인 ,군속으로 끌려가 희생된 사람들 이며 야스쿠니 신사에 위패가 약 2백45만여개가 안치 되어 있으니 한국인의 위패 안치 문제는 그다지 커다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패전후 한국,타이완 출신 점몰자 약 5만여명의 명단을 일본인 전몰자와 함게 야스쿠니측에 통보했다. 야스쿠니 관계자는 후생성의 통보를 받고 당시 관례되로 위패를 안치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생성은 한국인 유족에게 전사 통지를 하지 않았고 야스큐니 신사에 합사 했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인 유족에게는 외국인이라느 이유로 일본인 유족에게 지급한 연금등을 한푼도 지급하지 안았던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한국인 전몰자가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것은 1978년이며 그후 일본 정부가 1991년 보내온 태평양 전쟁 사망자 명부에서 합사된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할수 있다.

direct lender online payday loans

   일본 신사(神社)    25
   나고야    27